프롤로그. 어느 정보원의 서류함에서 발견된 서신
《친애하는 공작에게》
슬슬 가을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군. 몸이 힘든 건 좀 나아졌길 바라오. 내 둘도 없는 친우가 발걸음도 떼기 어렵다 하는 이야기가 들리니 짐의 마음이 편치 않소.
그대의 건강을 위해 뿔곰의 고기를 보내니 보양을 하시게나.
―제국의 황제가
《제국의 태양께》
연애 사업 중입니다.
―폐하를 언제나 걱정하는 공작이
《공작에게》
짐이 네놈 멱살을 잡고 끌어내길 원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 두 발이 멀쩡할 때 빠르게 오는 게 좋을 텐데. 부러진 채로 기어오고 싶은 건가?
―황제가
《황제 폐하께》
올해 고향으로 내려가서 결혼할 생각입니다. 청첩장은 돌리지 않겠습니다.
―애인이 어여쁜 공작이
《제국의 공작에게 보냅니다》
폐하께서 오늘 알현실의 원목 책상을 반으로 갈라 버리셨습니다. 두 분을 쌍으로 분질러 버리고 싶으니 이제 그만하고 일하십시오. 안 그러면 저 파업하고 동제국으로 날라 버릴 겁니다.
―재상이
《재상에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분질러 버린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짐이 그래도 제국의 태양이란 말일세.
그리고 이번은 공작이 잘못하지 않았는가. 짐 말고 공작만 분질러야지, 왜 짐은 떨이 상품의 덤처럼 딸려 가는 건가. 짐은 참으로 슬프다네.
―황제가
《황제 폐하께》
저는 분명히 공작저로 편지를 부쳤습니다만, 거기서 폐하의 답장이 오는 걸 보면 공작은 이미 날랐고, 폐하는 그곳에서 잠수 타시는 모양입니다?
―동제국의 재상이
* * *
《사랑하는 그대에게》
얼마 전까진 여름이었는데 이제 날씨가 시원해졌군요. 하늘도 맑아졌습니다. 우리가 만났을 때는 하늘이 흐리던 겨울이었지요.
나의 레이디, 그대를 만나고 싶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부디 그대 곁에서 차 한잔할 시간을 내주세요.
―그대를 사랑하는 남자가
《공작님께》
싫어입니다.
―늑대 기사단 단장
《사랑하는 레이디에게》
드디어 답장을 주셨군요! 감동했습니다! 글씨 한 자 한 자에서 그대의 지성과 품위가 느껴집니다. 어쩜 이리도 고울 수 있을까요!
그대의 답장은 마법을 걸어 제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사랑하는 레이디, 제가 갑니다.
―그대의 마음에 눈이 먼 남자가
《공작님께》
뒤질래, 이 XX(이 뒤부터는 흐린 글씨라 보이지 않는다).
―늑대 기사단 단장
* * *
《재상에게》
짐이 잘못 본 것 같은데 동제국이라니, 농담이지? 그렇지?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토끼 같은 서류와 여우 같은 밀정들이 있다네. 부디 마음 다잡아 주길 바라네.
아니, 짐도 할 말이 참 많다네. 공작 저 개새끼가 잠적하는 바람에 저놈이 해야 했던 일 절반이 나한테 오면서 내 이번에 휴가도 못 갔지 않은가. 지놈 연애 사업하면 다란 말인가? 그놈은 이날 이때까지 모태솔로인 짐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짐이 말일세, 그간 부끄러워 말은 못 했네만, 하도 사내놈들과만 부대끼다 보니 이제는 시녀장에게도 말을 못 걸고 있단 말일세!
짐이! 억울해서! 짐이 뭐가 지존이란 말인가, 하루하루 일하는 기계지!
짐도 연애하고 싶어! 암행 나갔다가 눈 맞은 평민 여자와 알콩달콩 연애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체를 밝히고 싶단 말일세!
―황제가
《황제 폐하께》
폐하 서재를 뒤져서 그 별난 소설들을 다 치우라고 말했습니다. 돌려받고 싶으시다면 황궁으로 돌아오시지요. 좋은 말 할 때 오시지 않으면 책들의 목숨은 없습니다.
―폐하를 꽤나 측은하게 생각 중인 재상이
《재상 각하께》
폐하께서 짐 싸셨습니다.
―공작저의 집사
* * *
《작가님께》
작가님, 이번 소설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중략)…… 다음 편도 기대 중입니다. ……(중략)…… 이번의 여주인공이 정말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중략)…… 남자 주인공이 정체를 밝힐 때는 ……(중략)…… 들려오는 소문에 작가님의 건강이 안 좋다고 하셔서 걱정입니다.
―작가님의 팬, E가
《E님께》
안녕하세요, 펜 네임 E님! 주신 편지 잘 봤습니다. 언제나 장문의 감상을 들려주셔서 고마워요!
건강은 별것 아니에요. 이제 가을이라 잠깐 감기를 앓은 것뿐이랍니다! 원래 잔병치레만 많고 큰 병을 안 걸리는 체질이라 가끔씩 이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럼 다음 작품도 기대해 주세요!
―사랑을 담아, 작가가
《작가님께》
작가님, 출판사 쪽으로 소소하게 조공을 보냈습니다. 부디 받아 주시고 앞으로도 건필해 주세요.
―작가님의 팬, E가
《E님께》
저기 E님, 혹시 E님이 보내신 거 아니죠? 출판사 쪽에서 만드라고라 뿌리랑 포션이 왔다는데, 아니시죠?
E님께서는 혹시 귀족분이신지요?
―동공지진 중인 작가가
* * *
《공작 각하에게》
공작님이 바람같이 튀어 주신 바람에 황제 폐하와 책을 가지고 실랑이를 하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그놈의 소설을 애지중지하는 폐하도 취존은 하지만 이해가 안 됩니다만, 공작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이면 백 까이면서 그렇게 보러 가고 싶으십니까?
공작님은 혹시 마조히스트십니까? 그 여기사가 곰도 맨손으로 잡아서 내장으로 줄넘기를 한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정도로 거친 플레이를 원하신다면 그냥 남자에게 부탁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재상이
《재상에게》
나의 그녀는 가련하고 아리땁고 곱습니다. 그리고 나는 마조히스트가 아닙니다.
―공작이
《콩깍지가 큰일인 듯한 공작 각하께》
이번에 까이고 올라오시면 안과부터 가 보시길 바랍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야 취향이 갈릴 순 있겠지만, 가련하다는 말에는 각하의 시력을 걱정할 수밖에 없군요.
그녀와 가장 가까운 몸매를 찾아보자면, 저희 황궁에서는 역시 제1기사단장이겠습니다만……. 상완근 근육의 모양새가 가련하단 소립니까?
―재상이
* * *
《정보원 B에게》
공작 각하 82번째 까이시고 돌아가는 중.
―정보원 A가
《정보원 A에게》
85번이시다. 그새 3번 청혼하셨더군.
―정보원 B가
* * *
《E님께》
그 뒤에 답장이 없으셔서요, 혹시 제가 민감한 걸 물은 건가 해서 편지 드려 봅니다. 제 질문은 잊어 주세요!
일단 주신 건, 만드라고라는 어떻게든 달여 먹기로 하고 포션은 아무래도 제가 쓸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근처 치료소에 기부했습니다.
이런 선물이 아니라도 언제나 주시는 팬레터만으로도 저는 너무 행복해요, E님! 첫 작품 때부터 지금까지 늘 편지 써 주시고 있잖아요! 제가 꾸준히 작품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E님의 편지랍니다! 정말이지 늘 감사하고 있어요.
날씨도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건강 조심하세요!
―작가가
《작가님께》
(어설프게 만들어진 뜨개질 목도리)
―E
《재상께》
일단 보내긴 했습니다만, 설마 저거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만드신 겁니까?
―정보원 B
《정보원 B에게》
그렇습니다. 그 거구가 바늘 코 뜨다가 칼로 뜨는 게 낫겠다며 칼부림을 시작할 때엔 드디어 미쳤나 싶더군요.
어쨌건 도착했으면 됐습니다. 얼마 전의 포션은 너무 과한 것 같았으니…….
일단 그녀의 안전을 유의해 주세요. 여차하면 폐하께 미끼용으로 쓸 소설 하나쯤 부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재상이
* * *
《실연의 슬픔에 쓰라릴 내 친우에게》
자네가 3번이나 까이고 돌아온다고 들었네. 거 눈만 보면 청혼해 대니 그 기사가 얼마나 질리겠는가. 창틀에 붙은 시트 떼고 난 뒤 남은 끈적이보다도 끈질긴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자고로 연애라는 게 그런 게 아니지 않나.
짐이 그대가 3번이나 까였다니 안쓰러워서 그러네. 3번이나. 숨만 쉬어도 좋다는 건 알겠네만, 좀 적당히 해야지. 마법사란 놈들은 원래 그 모양인가. 그러니까 3번이나 까이는 게 아닌가.
―황제가
《빌어먹을 황제 놈에게》
닥쳐, 연애는 개뿔. 소설만 읽는 주제에. 너 시녀장한테도 말 못 걸잖아.
―공작이
《공작 각하께》
편지를 전달해야 할 정보원이 제목을 보고 사정없이 눈을 떨고 있습니다. 그런 말은 내용에서 해 주시길 바랍니다.
―재상이
* * *
《서제국의 재상에게》
본좌가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다네. 그대가 본좌의 나라로 온다 했다더군?
꽃길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언제든지 오시게나.
―그대를 탐내는 또 다른 황제가
《동제국의 여우에게》
얜 안 가!
―황제
《동제국의 여제님께》
상사의 기행에 잠시 욱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직하게 된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재상이
* * *
《공작 각하께》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반년 만에 뵈었군요, 각하. 북벽의 마법진을 늘 점검해 주시고 가시니 기쁩니다.
수도의 황제 폐하께서도 평안하신지요. 부디 별일 없길 바랍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각하께서 그 아이를 찾을 때마다 훈련이 더더욱 험해져서 저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버립니다.
단장이 마음에 드신 건 알겠습니다만, 오실 땐 기별이라도 주시고 오셔야 저희가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주든 맛있는 밥을 먹이든 해서 대비를 할 수 있으니, 부디 이다음엔 먼저 연락 부탁드립니다.
―변경백
《변경백께》
폐하께서는 별일이 없다 못해 심심하신가 봅니다. 그대가 걱정할 일은 없소. 그리 보여도 전신(戰神)이시니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군. 미안하외다, 변경백. 다음에 갈 땐 무언가 선물이라도 사서 가도록 하겠소. 원래 주변부터 공략해야 했는데 내 깜빡했소. 이 몸을 일깨워 주어 매우 고맙소이다.
내 아리따운 꽃은 오늘도 어여쁘신가? 조만간에 또 들를 터이니 그때는 꼭 만남을 주선해 주시길 바라오.
―공작
《각하께》
꽃이요? 던전의 식인식물 말씀하십니까? 얼마 전에 육식형 식인식물을 발견하긴 했습니다만…….
―변경백
제1장. 사람들
오랜 시간 북방 벽을 지켜 온 지크프리트 변경백은 당황스러웠다.
3년 전인가부터 두 달에 한 번씩 이 먼 북방까지 들러 쑥대밭을 만들고 홀연히 떠나 버리는 그 미친 공작도 당황스럽고, 그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그가 열렬히 신임해 마지않는 늑대 기사단장 역시 당황스러웠다.
지크프리트를 이렇게까지 심란하게 만드는 사람을 본 기억이 언제던가. 적어도 선대 변경백의 급사 후 불과 열다섯 나이에 백작위에 앉은 뒤 훌륭히 변경을 지켜 온 30년 사이에는 보지 못했다. 한데 갑자기 이렇게 둘이 한 쌍으로 그를 괴롭게 만들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아니, 바른말로 하자면 기사단장은 나쁘지 않다. 아직 외국 말이 서툴러서 쓰는 단어며 어투가 어색하긴 하나, 브리지타는 이 북벽에는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전력이었다. 나쁜 건 어디까지나 공작이다. 지크프리트는 이것만큼은 확신했다.
그런데도 변경백은 공작이 싫다기보단 신기했다. 대개 사람의 취향이란 제각각이라고들 하지만, 기사단장 브리지타는 공작이 돌림노래처럼 말하는 ‘아리땁고 청초한 은방울꽃’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변경백과 거의 비슷할 정도의 장신에, 꽉 짜인 근육은 손대면 터질 듯하고 팔뚝은 어쩌면 여염집 처자들의 허벅지보다 굵을지도 모른다.
얼굴은 또 어떠한가. 이번에 제1참모가 말하길, 가장 잘생긴 기사 대회―변경백은 이런 대회가 있다는 것에 탄식부터 했다―에서 올해도 거의 몰표를 받아서 뭇 기사들의 원망을 들었다던가.
잘생겼다든지 멋있다든지 하는 것까지야 이해하지만, 은방울꽃이라니? 역시 아무리 지크프리트라도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이다.
“수도로 가겠습니다.”
“혹 각하께서 무어라 하셨는가?”
협박이라도 했냐는 소리다.
“그 검은 머리를 쪼개고 싶지만, 그 때문은 아닙니다.”
홀카에 ‘머리를 쪼갠다’는 다른 뜻의 속어가 있길 바라며 변경백은 아려 오는 목덜미를 짓눌렀다. 나이를 먹었나 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따라가질 못해 이렇게 삐걱거리는 걸 보니.
“여기는 많이 지켰습니다. 다들 컸다? 성장? 했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갈 수 있습니다. 윤허해 주십시오.”
브리지타의 눈은 진지했다. 변경백을 바라보는 북부 늑대 같은 노란색 눈에는 신뢰와 호의가 가득했다.
변경백도 그런 그녀를 딸처럼 아꼈다. 그래서 공작이 와서 한 번씩 헛짓거리할 때마다 모른 척 브리지타를 다른 곳으로 빼돌린 게 아닌가.
한데 왜 갑자기 이럴까. 혹여 마음이 변해 공작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생각하기로 한 걸까. 만일 그렇다면 기사단 정복 바짓단이라도 붙잡고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말릴 생각도 하고 있던 변경백의 귀로 브리지타의 듬직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황제 폐하께 결투를 신청하고 싶습니다.”
북의 늑대 기사단장이자, 북벽의 수많은 처자의 마음을 훔친 잘생긴 기사 대회에서 3년째 1위,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늦둥이 딸이나 다름없는 브리지타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변경백은 이번에야말로 목덜미를 부여잡고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 * *
제국의 황제, 카를로스 요제프 2세 루밀레사는 전신(戰神)이라고도 불리는 사나이였다.
대륙 최강의 사나이, 혹은 전쟁의 신. 또 다른 말로는 전장의 개또라이.
맨 마지막의 호칭은 적국의 병사들이나 공작이 부르곤 하지만, 여하간에 그런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 사나이였다.
루밀레사 황가의 특징─빛을 받으면 붉은 기가 도는 검은 머리와 선천적으로 엄청난 신체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황제에게 3년 전부터 큰 고민이 생겼다.
친애하는 사촌 동생이자 공작이 일을 자꾸 팽개쳐 버린다.
덕분에 요전번에도 그 빈자리를 메운다고 만인지상인 그가 직접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신청해 놓은 휴가를 놓쳐―그는 이 점에도 불만이 가득했다. 어느 황제가 휴가를 신청까지 하며 쓰는가?― 은밀한 취미 생활 중 중요도 최상에 올라가 있는 일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게 어떤 기회였는데 날려 버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울분에 차 밤새 검이라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다. 재상은 또 달밤에 춤춘다며 뭐라 하겠지만, 신하들의 홀대 속에서도 그는 꿋꿋했다. 이 역시 루밀레사 특유의 뻔뻔함과 무심함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도 빡이 쳐서, 아니 열이 올라 달밤에 체조하며 그는 생각했다.
올해 서른둘인 황제는 이리 보여도 나름 국정도 잘 살피고 있었다. 선제가 벌인 전쟁으로 10년 동안 앓은 제국을 정상으로 돌려놓느라 한 생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재상이 하라는 대로 굴러다니며 온갖 고생은 다 했다.
덕분에 얻은 평가는,
‘의외로 소탈하신 황제 폐하.’
‘의외로 머리가 좋은 황제 폐하.’
그 ‘의외로’가 대체 뭣 때문에 붙는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재상은 외모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늘에 맹세코 역사서 앞에 부끄러울 폭군은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름의 자부심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황제의 무던한 신경 줄도 그놈의 공작 때문에 요 3년 사이 자꾸만 시험당하고 있었다.
“나도 휴가 줘!”
휴가가 잘린 울분으로 온 힘을 다해 내려친 황제의 괴력에, 죄 없는 목각인형 하나가 또 바스러졌다.
* * *
“결혼시켜 주시오.”
“상대방에게 허락받아 오십시오.”
막시밀리안 공작의 요청을 재상은 단칼에 거절했다.
말 자체는 거절이 아니지만, 속뜻은 단호한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벌써 83번―아, 아니 85번이던가?― 그 정도로 차이지 않았나. 그 화려한 이력 덕분에 재상은 공작이 마조히스트라는 의심을 아직 거두지 못했다.
“내가 결혼하면 재상께도 좋지 않소. 가정이 생기면 사람이 안정적으로 된다고 하니, 내가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일도 적어질 거고. 이상한 실험 하다가 멀쩡한 궁 하나 깨 먹는 일도 적어질 거고.”
이상한 실험이라는 걸 본인이 알고 있다는 점이 제일 질 나빴다. 하지만 어쨌든 그만큼 돈을 뜯어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재상은 이마에 선연히 떠오르는 핏줄을 꾹 눌렀다.
루밀레사들은 왜 다 이렇게 막무가내인지.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공작이 차일 때마다 재상은 그 변경백의 기사단장에게 금화를 상자째로 내려 주고 싶을 만큼 통쾌했다. 평소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굴던 공작이 비 맞은 개처럼 터덜터덜 돌아올 때의 그 쾌감이란.
순간적으로 그렇다면 나는 사디스트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이내 부정한 재상은 황궁에는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찻잔을 챙,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급하게 가신다고 망가트리신 게이트가 셋. 막는 기사들을 마법으로 후려쳐서 생긴 부상자 다섯. 그중 중상자 하나. 목숨은 위험하진 않지만, 아직 거동은 불편합니다.”
“얼마지?”
어차피 돈은 많다. 익숙하게 수표책을 꺼내며 공작은 재상에게 물었다. 그러나 재상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폭탄을 터트렸다.
“돈은 됐고, 나중에 제가 요구하면 폐하의 연애 사업이나 도와주시지요.”
* * *
공작에게는 농담하듯 건넸고 공작 역시 농담으로 알아들었지만, 사실 재상은 진심이었다. 그는 싸구려 차를 타며 창밖 평화로운 황궁을 바라봤다.
올해 황제의 나이가 서른둘. 이미 날이 가을로 접어들었으니 내년이면 서른셋이다. 그리고 혼자다. 그냥 단순히 혼자라면 아슬아슬하게 상관없는 나이지만, 황제는 후궁이 없는 건 물론이고 정부가 있다는 염문 하나 돈 적이 없는 깨끗하신 몸이다.
그렇다.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는 모태솔로이시며, 그걸 심지어 온 제국이 다 알고 있었다. 제국이 무슨 말인가, 아마 다른 나라에서도 다 알 것이다.
외모는 나쁘지 않다.
덩치가 좀 크긴 해도 황실기사 총단장처럼 뭇 여성들이 보기 부담스러울 만큼 근육이 과하게 자리 잡은 것도 아니고, 어느 쪽이냐 하면 구르면서―물론 이것은 고풍스러운 묘사가 아니라 실제로 바닥을 구른 것을 뜻한다― 생긴 생활형 근육이다.
얼굴은 사람 따라 취향은 갈릴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루밀레사는 박색이라는 소리를 듣는 가계가 아니었다. 시녀장에게 듣자 하니, 멀리서 수줍어하며 몰래 좋아하는 아가씨들은 은근히 있다고 했다. 그 아가씨들의 취향이 보편과는 거리가 먼 독특한 수준이 아니라면, 이 정도면 잘생긴 게 맞으리라.
검은 머리에 꽤 부리부리한 눈,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눈 하나는 자수정같이 반짝거리는 게 볼만하다고 재상 역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 뭘 하나. 여자 얼굴도 똑바로 못 쳐다보는데.
황제의 처절한 편지보다 재상은 더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간 옆에서 키운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모를까. 남들이 보기엔 그저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지만, 오랜 시간 황제와 함께한 재상이 판단하건대 단순히 부끄러워서 차마 쳐다보질 못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차갑다며 태도에서 감점, 장점인 눈동자도 남이 볼 수 없다. 아무리 재상이라도 이건 여러모로 힘들었다.
그럼 정략결혼이라도 하라고 했더니, 로맨스 소설을 사랑해 마지않으시는 우리의 빌어 처먹을 폐하께서는 ‘어마, 뜨거라’ 펄쩍 뛰시며 절대로 싫다 하셨다.
그때 재상은 이 새끼의 머리통을 한 번만 내려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역시 입 밖으로 내면 반역이라 스스로를 타이르며.
그 와중에 공작까지 난리를 치기 시작하니 요즘 재상은 탈모가 고민될 정도로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는 시간이 많아졌다.
둘이 쌍으로 지랄이니 정말 힘겨웠다. 한 놈은 대륙 최강의 사나이고, 다른 한 놈은 마탑의 탑주에게서 사사받은 마법사다. 힘으로는 어떻게 안 되니 더 돌아 버릴 지경이다. ……진짜 둘 다 한 대씩만 때렸으면 좋겠다.
얘기가 좀 빗나갔지만, 어쨌든 재상은 요즘 들어 더 고민이었다. 슬슬 황제 폐하의 혼처에 대해 귀족원의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야 그렇겠지. 전쟁통에 다 죽어 나가는 바람에 지금 루밀레사는 황제와 황제의 사촌인 공작밖에 없었다. 그 둘이 급사할 거라는 생각은 상식적으로 들지 않지만, 문제는 후사다. 아무리 그래도 다들 그 또라이 공작보다는 말이나마 통하는 황제의 자식이 낫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눈치 주지, 저기서 찔러 보지, 애꿎은 재상만 등 터지고 있었다.
그래서 재상은 결심했다. 더는 못 참겠으니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황제를 장가보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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