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1장. 꿈결처럼 찾아온 너 (1)
어느 가을의 햇살 쏟아지는 아침, 에데르카 제국 최고의 갑부인 레인하르드 던컨이 작성한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유언장의 1항과 2항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였으니.
다만 마지막 조항은, 내용을 알게 된 사람들이 전부 뒷목을 잡고 넘어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누가 그랬었지.
레인하르드 던컨은 제국 최고의 미친, 아니, 괴짜라고.
그 유언장의 마지막 조항은─
[던컨 회사 지분의 10%를 고양이 ‘루비’가 택한 다음 주인에게 상속한다.]
─참으로 강렬한 한 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흰색 털과 푸른색 눈의 페르시안 고양이는 자신의 주인을 간택하러 길을 떠났다.
* * *
복도에 볕이 길고 화사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가을의 늦은 오후는 늘 그렇듯 게으르고도 안온했다. 느리게 물결치는 적막 사이로 문이 슬쩍 열리더니, 한 소녀가 문틈 사이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아이는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 듯, 발돋움을 한 채로 부엌을 총총 빠져나왔다.
에데르카 제국에서 사생아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리고 아르테스 백작가의 사생아인 로넬 아르테스 역시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대저택의 하인들은 그녀의 말을 못 듣는 척, 그녀 자체를 못 본 척 무시하며 사라지니까.
로넬은 두꺼운 카펫 위를 조심조심 걸어 나갔다.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 했다.
소리 하나라도 내면 안 돼. ‘유령’ 취급보다 더 무서운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잖아.
행여 그들의 눈에 띄었다간─
“야, 멍청아. 뛰지 말랬지.”
─로넬은 흠칫 놀라 삐꺽거리는 고개를 돌렸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소년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녀를 뜯어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로이드 도련님.”
“사생아는 멍청하다더니 도저히 배워 먹질 못해.”
안 뛰었는데.
로넬은 억울해하지도 못하며 입술만 꾹 깨물었다. 로이드가 두꺼운 책을 던지려 시늉하는 것에 머리를 얼른 감싸자, 위에서 웃음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피하지도 않냐? 진짜 멍청하기 짝이 없어.”
피하면 더 화를 낼 거면서…….
어느새 소년의 손에서 떠난 책이 포물선을 그렸다. 로넬은 피하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고, 힘차게 날아간 책은─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복도의 콘솔 위에 올려져 있던 화병을 깨부쉈다. 로넬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경악했다. 머지않아 두 아이는 복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두꺼운 카펫 위를 망설임 없이 걷는 발걸음.
이 저택에서 저렇게나 크게 소리 낼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어, 로넬은 절망했고 로이드는 조소했다. 교차하는 희비 속에서 소리는 커져만 갔다. 이윽고 나타난 백작 부인은 산산조각이 난 화병과 엎어진 책, 경련하는 사생아와 비웃는 아들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메리.”
방금 로넬이 나왔던 부엌에서 하녀 메리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한껏 허리를 굽힌 하녀에게 아르테스 백작 부인은 고고하게 명령했다.
“치우렴. 그리고 너는.”
“죄송합니다, 부인.”
로넬이 뻣뻣하게 사과를 읊조리자, 백작 부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의미도 없는 사과구나. 네가 정말 미안하다면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졌어야지.”
“지금, 돌아가려 했, 습니다.”
“네 존재 자체가 백작가의 수치라고 몇 번을 말했니.”
“죄, 송…….”
“주제 파악을 하라 그랬지. 죽은 듯이 살라고.”
“…….”
“왜 내 아들 앞에 나타나서 아이의 심기를 계속 거스르는 거지?”
로넬은 잠자코 머리를 숙인 채, 부인의 서릿발 같은 꾸중이 연신 그녀의 목을 옥죄는 것을 감내했다.
“그 더러운 머리 뉠 지붕 하나 관대하게 내어 주는 것에 감사하기는커녕.”
안에서부터 감정이 꾸역꾸역 차올랐지만, 꾹 참고 버텼다. 부인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으니까.
“메리, 이것이 정원의 헛간에서 언제까지 머무르기로 했지?”
“그, 저, 아, 일주일 뒤에 저택으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열흘로 늘려.”
“알겠습니다, 부인.”
메리가 냉큼 허리를 숙였고, 로넬 역시 마찬가지로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정도의 처벌로 끝난 게 어딘가. 생각보다 운이 좋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사각거리는 옷자락 소리와 함께 장미 향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빨리 끝나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로넬은 부인의 구두가 시야 속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에 경악했다.
“숨 참아야지.”
“……네, 부인.”
“네 역겨운 숨소리 하나 듣기 싫다고 했잖니.”
숨을 참는 아이의 얼굴이 이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그 처참한 붉은빛을 구경하고 나서야 부인은 발걸음을 돌려 로이드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히죽거리던 소년은 얼른 제 어머니의 손을 붙들었고, 둘은 사이좋게 계단 위로 사라졌다.
로넬은 냉큼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늘 저녁도 넘겼다…….”
식사 때마다 로넬은 몰래 저택을 방문해야 했다. 원칙적으로 그녀는 이 저택의 유령 같은 존재이니, 누구도 식사를 가져다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이의 익숙한 방관과 일관된 무시 속에서 로넬은 부엌을 방문해 음식을 입 안에 쑤셔 넣고 도망쳤다.
배가 너무 고프니 어쩔 수 없었다.
“로이드 만나기 싫은데.”
요즘 로이드는 심심하면 그녀를 잡아내어 심술을 부리곤 했다. 로넬은 냉혹하기 짝이 없던 부인의 눈길, 로이드의 비틀린 시선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일 아침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헛간으로 가기 위해 그녀는 터덜터덜 정원을 가로질렀다.
“추워.”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낡고 해진 잠옷은 바람을 전혀 막아 주지 못했다. 로넬은 눈 밑을 세게 문지르면서, 곱아들기 시작하는 손가락을 최대한 꼼지락거렸다.
“오늘 밤 엄청 춥겠다.”
담요로 버틸 수 있으려나? 앞으로 열흘은 더 바람이 송송 들어오는 헛간에서 버텨야 하는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던 아이는 결국 풀이 죽었다. 너덜너덜한 신발 속 발가락을 움찔거리며 문고리를 잡던 찰나.
냐옹─.
갑작스레 들린 작은 울음소리.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자 담벼락 위의 흰색 꼬리를 볼 수 있었다.
윤기 나는 흰색 털, 우아한 몸, 그리고 번쩍거리는 푸른색 눈.
“꺄아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이 정원에 의미 없이 떠돌았다. 심술궂은 표정의 고양이가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려, 우아하고도 도도하게 그녀에게 다가온다.
로넬이 비명을 지른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고양이가 그 통통하고도 어여쁜 앞발을 들어 그녀의 발을 찰싹 내리쳤다.
타격음이 찰지게 울려 퍼졌다.
“고, 고, 고, 고…… 양이?”
참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 그러다 냐옹, 고양이가 재차 울었다.
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한동안 연보라색을 유지하고 있던 하늘이 급속도로 어둠을 머금었다.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짙은 남색이 빠르게 번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고양이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 로넬은 소심하게 말을 건네 보았다.
“안녕?”
“…….”
“안녕, 고양이야?”
그늘 속에서 고양이의 새하얀 털이 윤기를 자랑했다. 누가 봐도 풍성하고 매끄러워 관리를 잘 받은 태가 난다.
만져 보고 싶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던 로넬은 흙먼지 가득한 손바닥을 보고 시무룩해졌다. 참아야지. 그녀가 만졌다간, 저 완벽하게 깨끗한 털이 더러워질 게 분명했다.
냐─옹. 작게 가르랑거리는 소리.
고양이의 푸른색 눈이 화사하게 반짝였다. 여름 정원을 가득 메우던 반딧불이처럼 찬란한 빛이었다.
로넬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꿈결처럼 어여쁜 고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주인이 있을 거다. 돌아갈 집도.
저렇게 예쁜 고양이를 보호해 줄 집이 없을 리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아?”
그녀가 조곤조곤 속삭이자 고양이가 대답 대신 귀를 쫑긋거렸다. 지그시 바라보는 그 시선 속엔 ‘너는’이라는 되물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 난, 음. 여기 헛간에 살아. 같이 들어가 볼래?”
지그시 그녀를 노려보는 눈동자에 저절로 기가 죽는다. 사과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해 보던 순간, 고양이가 도도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안내하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로넬은 냉큼 일어서서 헛간 문을 열었다.
“좀, 엉망이라 미안.”
‘좀’이 아니라 ‘좀 많이’ 엉망이지만.
익숙하고도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장에 걸려 있는 거미줄과 군데군데 소복이 쌓여 있는 먼지. 어딘가서 꾸물꾸물 나타난 벌레 한 마리를 발로 콱 때려잡은 고양이가 꼬리를 한번 살랑 흔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로넬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감히 자신을 이딴 곳에 초대할 수 있냐는 항의 같아, 로넬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 미안. 내가 당분간 저택에 들어가면 안 되어서……. 그게 아니면 저택으로 데려갔을 텐데, 거긴 진짜 깨끗해. 이곳과는 달라.”
냐─옹.
“미안.”
로넬은 손을 뻗다가 다시 물렸다. 이렇게나 더러운 손으로 저렇게 깨끗하고 예쁜 고양이를 만질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부인과 로이드가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는 건 아마 그녀의 꼴이 너무 엉망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고양이는 분명 주인이 있을 테니, 그녀처럼 더럽게 만들지 말고 깨끗하게 주인의 품으로 돌려보내야겠지.
“미안.”
로넬은 이를 악물었다.
부인의 말대로 머무를 곳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해야 하는 일임을 잘 알면서도, 문득 자격 없는 설움이 북받쳐서.
그녀는 다소 세게 눈가를 문지르며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내려 애썼다.
고양이가 당황할 수도 있으니 울면 안 돼. 참아야지.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자, 고양이가 문득 다가와 앞발로 그녀의 신발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으응?”
로넬은 얼떨결에 꿇어앉았다. 고양이가 아주 자연스레 무릎으로 올라타더니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자신의 자리라고 주장하는 듯 만족스럽게 가르랑거리는 소리. 그 귀여운 울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위로해 주는 거야?”
마치 그렇다는 듯 고양이가 맑게 울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소중하게 안아 든 로넬은 초라한 침대에 누워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깨진 유리를 간직한 창문 너머로 어느새 별이 한 아름 뜬 밤하늘이 걸려 있다.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의 나직한 한숨 소리가 화음처럼 울려 퍼졌다.
고양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자, 흰 꼬리가 붓처럼 나붓하게 흔들렸다. 품 안에 맴도는 온기에 저절로 입매가 늘어졌다.
“비밀 하나 알려 줄까?”
로넬은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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