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1장. 하필 오늘이라니 (2)
지금 이 상황이 내게 처한 함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알아내야만 그다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방을 나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방금 무슨 소리예요!?”
에밀이었다. 그녀는 황궁에서부터 함께 한 나의 유모였다.
“…에밀?”
에밀이 여기 어떻게 있는 거지? 그녀도 분명 죽었는데.
반역이 일어나고, 그 소식을 한발 늦게 알게 된 내가 황궁으로 달려 나가려고 할 때, 그녀는 나를 지키려다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기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루이스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녀의 죽음을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난 것처럼 에밀도 다시 살아 돌아왔나 보다. 다행이다.
에밀을 향해 미소를 지으려고 할 때였다. 그녀가 번쩍, 하고 눈빛을 빛내더니 빛의 속도로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아기씨. 얼굴에 그 상처는 뭐에요!?”
그녀의 손이 내 얼굴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이거…….”
좀 전에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뺨을 때린 게 자국이 남은 것 같았다.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지만, 이미 에밀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감히 누가…!”
“아냐. 이건 내가…….”
안 되겠다. 괜히 애먼 사람 잡기 전에 사정이 있어서 내가 한 거라고 얘기를…….
“네? 그게 무슨…아기씨가 왜…설마.”
하려고 했는데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이미 에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면서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에 당황한 것은 바로 나였다. 아니 갑자기 왜 울어? 울더라도 설명할 기회는 주고 울어야지. 왜 혼자 멋대로 추측해서 울어. 울기는.
나는 당황해서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에밀을 달래 보려고 했지만, 에밀의 눈물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첫날밤에 퇴짜 맞은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우리 불쌍한 아기씨”
‘아기씨’라니. 에밀의 눈에는 내가 아직도 어린애로 보이나 보다. 에밀이 결국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잠깐……. ‘첫날밤에 퇴짜’라니?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인데.
갑자기 머릿속의 기억이 거꾸로 감기기 시작했다.
‘이 말…들어 본 적 있는데. 언제였지.’
과거에도 에밀이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첫날밤이 지난 다음 날 아침, 그녀가 내게 한 말이었다.
“…말도 안 돼.”
“당연하죠! 이게 어떻게 말이 될 수가 있냐고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을 들은 에밀이 분노하며 맞장구쳤다.
아니, 내가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헤레이스가 첫날밤에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일은 무려 5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리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아기씨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개미 새끼인 줄 아는 황제께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듯이 아끼는 분이…….”
“…….”
“왜 하필 그딴 놈하고 결혼하겠다고 하셨는지.”
에밀은 여전히 훌쩍이면서도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내게 들으라는 듯이 푸념을 했다.
‘근데 에밀, 그래도 그렇지. 아니. 오라버니가 날 아끼는 건 맞는데, 하늘을 우러러보듯이 아끼다니. 오라버니가 들으면 에밀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에밀의 말은 과장을 넘어 왜곡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루이스의 난폭한 성격을 그대로 표현하고 헤레이스를 ‘그딴 놈’이라며 대놓고 욕했다.
하지만 에밀의 한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유모는 정말이지 속상해서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좋은 혼처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타국의 왕도 있고 바다 건너에 황태자도 계시는데. 그런 분들을 두고 하필 골라도 저딴 놈을!”
에밀은 처음부터 헤레이스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에밀은 헤레이스가 나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이익만 쏙쏙 빨아 먹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와 있을 때면 언제나 그를 ‘그놈’이라든지 ‘그 자식’이라고 부르면서 분노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에밀은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만 했을 뿐이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 상태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죽다 살아난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죽은 그날로부터 5년 전으로 회귀한 것 같았다. 그 말은 곧 내게도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모두 맞는다면, 지금이 정확히 어떤 시기인지가 중요했다. 언제 어떤 상황으로 회귀했는지. 이미 예상되는 시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에밀. 오늘이 정확히 무슨 날이야.”
“무슨 날이긴요! 망할 헤레이스 공작 그놈과 결혼하고 맞는 첫날이죠!”
유모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첫날부터 혼자 내팽개치다시피 한 자신의 주인을 보고 있으니 계속 화가 나는 것 같았다.
‘역시…….’
생각대로 그날이 맞았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었다. 내게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기회를 줬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왕 준 기회인데 결혼 전으로 보내 주지 않았을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도 원망스러웠다. 돌려보내 줄 거라면 심술 같은 거 부리지 말고 온전하게 결혼 전으로 보내 주시지. 왜 하필. 회귀를 해도…….
“어떻게 아기씨를 혼자 두고 그럴 수 있는지. 저는 아직도 분해서 이가 갈립니다…!”
에밀은 분노가 차 헤레이스를 열심히 물고 뜯으며 시원하게 욕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일단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변화를 겪었고,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밀. 나 좀 혼자 쉬고 싶어.”
“알겠습니다. 문 앞에서 대기할 테니까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에밀은 마지막까지 분노하면서 나갔다. 그러고 나서야 드디어 나는 혼자 있을 수 있었다.
하나씩 정리해 보자면, 지금은 헤레이스와 결혼을 하고 하루가 지난 시점이다. 과거에 겪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지금도 펼쳐지고 있었다.
첫날밤은 내게 이미 5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나는 내 기억 속에는 5년 전이지만, 현실에서는 바로 전날 있었던 첫날밤을 떠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방에서 그를 기다리는 동안, 앞으로의 신혼 생활에 대한 부푼 기대감으로 두근거려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 하지만 신방에 들어온 헤레이스는 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혼자 자리를 잡고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셨다. 그러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오로지 내 의지만으로 성사시킨 결혼이었다. 그는 원하지 않지만, 황제의 힘에 눌려서 한 결혼이었다. 바람둥이로 유명한 그가 폭군인 황제가 끔찍이 아낀다는 황녀에게 팔리듯 결혼을 했으니 숨 막히는 것이 당연할 거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강행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결혼을 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를 배려하고 기다리면 그도 내 맘을 알아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결혼했다. 앞으로 평생 헤레이스와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시간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날부터 그를 벼랑 끝으로 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제가 공작님께 해 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답니다.’
‘…….’
나와 결혼해 준 것을 보답하고 싶었다. 나와 결혼해서 그에게도 좋은 일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가 나와의 결혼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헤레이스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더 초조해졌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얘기하세요.’
‘…….’
그 결과, 어쩌면 내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고 꺼냈던 한마디.
‘그러니…꼭 저한테 돌아오셔야 합니다.’
‘…….’
헤레이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했다. 분명 그때의 나는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에 돌아올 곳이 저였으면 해요.’
‘예. 그러죠. 그럼 지금 나가서 아침에 돌아오기만 하면 되겠지요.’
헤레이스는 매정하게 그 말을 남기고 정말로 나가 버렸다.
‘피곤할 텐데 푹 쉬세요.’
그의 마지막 말만큼은 다정했다. 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가슴 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때 잠시간 마주쳤던 눈빛이 다정해서 그가 마음을 바꾸고 내 옆자리에 함께 누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그대로 신방을 나서서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5년 내내 매일 밤 나에게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며 눈물로 지새워야만 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듯 헤레이스는 하루에 한 번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다음 날 아침에 돌아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다음 날 저녁에 잠깐 얼굴만 비춘 채 다시 나가 버렸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그를 기다렸다.
우리가 여전히 부부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아 안심할 수 있는 만남은 그가 ‘돌아왔습니다.’라며 영혼 없는 인사를 내게 할 때뿐이었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돌아와 나를 돌아봐 줄 그를 기대하면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헤레이스 공작가는 헤레이스의 부친의 사업 실패와 모친의 사치로 인해 가세가 기울고 있었다. 나는 헤레이스와 결혼하면서 그 빚을 탕감해 주고, 황실 지원 사업을 헤레이스 공작에게 연결해 주며 집안을 일으켰다.
헤레이스는 그 힘으로 황제이자 내 오라버니인 루이스를 죽였다.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제4화. 1장. 하필 오늘이라니 (3)
끔찍한 결말의 시작은 바로 나와 헤레이스의 결혼이었다.
만약 내게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헤레이스를 만나기 이전이어야만 했다. 아니, 최소 그와 결혼하기 전날…그것도 안 된다면 결혼식 당일로 보내 줘야 했다. 내가 헤레이스와 결혼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바꿀 기회를 줄 의도였다면…최소한 그랬어야 한다. 그게 자비지!
하지만 내가 돌아온 날은 결혼식 다음 날…즉, 결혼 첫날이었다.
“왜 하필 오늘인 거야…….”
내게는 헤레이스와 엮이지 않도록 그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기회 따위는 없었다. 이미 결혼식까지 치른 후로 회귀하다니. 이게 기회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었다.
딱 하루 차이. 하루…아니 반나절만이라도 앞으로 회귀시켜 주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텐데. 무엇 하나 달라질 게 없는 오늘이라니, 이건 기회가 아니라 농락이었다.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단 하루 차이로 나는 여전히 헤레이스와 결혼한 상황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부인.”
헤레이스였다. 첫날밤 내내 자리를 비웠던 헤레이스가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이었다.
“…!”
나는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죽음을 넘어 회귀를 한 지금 이 순간에도 헤레이스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라도 되는 것처럼.
내 앞에 서 있는 헤레이스는 누구라도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금발은 주위마저도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밝았다. 눈을 가릴 듯 말 듯 한 앞머리 사이로 나를 향하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헤레이스는 내가 그를 관찰하듯이 빤히 보고 있는 시선을 마치 알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회귀 전엔 단지 헤레이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온종일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었다. 오로지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훌쩍 지나갈 만큼.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의 모습은 즐거움보다는 분노에 가까웠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회귀 전 그가 내게 저지른 일들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떠올랐으니까.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한계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헤레이스가 말했다.
“이제 황궁으로 가야 합니다.”
이래서 찾아온 거구나. 회귀 전에 지금과는 달리, 그와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결혼 첫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온 헤레이스는 내게 이 말을 했었다. 결혼해서 앞으로 잘 살겠다며 루이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
헤레이스의 말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붕 뜬 것 같은 감각이 사라지고, 이게 정말 현실이라는 실감이 났다.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이.
“…알겠습니다. 준비하죠.”
내 대답에 헤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나는 천천히 채비를 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헤레이스를 볼 때마다 울컥하는 감정도 정리해야 했다.
과거에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루이스는 헤레이스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지막까지 나와 헤레이스의 결혼을 반대했으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황가와 공작가의 악연,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마음으로 진행하는 결혼식. 루이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헤레이스는 내게 아주 작은 애정조차도 없었다. 그렇기에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도 생략했었다. 내 일방적인 고백과 끈질김으로 어쩔 수 없이 허락했을 뿐, 루이스는 결혼 당일까지 내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루이스에게 헤레이스의 편을 들며 앞으로 보란 듯이 잘살겠다고 큰소리쳤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거짓말이 되어 버렸지만.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올 거라는 루이스의 말이 전부 옳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시기에는 루이스가 살아 있다!
헤레이스의 손에 피를 흘리며 결국 내 앞에서 세상을 떠난 나의 오라버니. 하지만 지금은 그가 살아 있다. 회귀 전과는 다르게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그제야 새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그대로는 아니었다. 회귀한 시기가 이미 헤레이스와 결혼한 상황이라도, 앞으로 모든 일이 그대로 반복되어 결국 반역에 이르게 되더라도, 아직 바꿀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었다. 나의 하나뿐인 오라버니, 루이스가 살아 있으니까.
‘오라버니. 얼른 보고 싶어요.’
빨리 황궁에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두 눈으로 살아 있는 루이스를 확인하고 싶었다.
2장. 나의 오라버니 (1)
훌쩍…훌쩍.
황궁에 들어와 루이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졌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기색이 없었고, 나는 눈물도 모자라 콧물까지 질질 흘렸다. 대체 이게 무슨 추태인지.
“폐…폐하아아으…….”
“…….”
“오라버니…이이…흡…흐읍. 흐으으…….”
구름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이 떠오르는 까만 머리카락은 나에게도 있었다. 제국의 황후였던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었다. 나와 나의 오라버니가 남매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유일하게 닮은 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갈색인 나의 눈동자와는 다르게 우리의 아버지였던 선황제를 닮아 피를 연상시키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 때문에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람들이 무섭게 여기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정겨웠다. 그립고 또 보고 싶었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루이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헤레이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도 나의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살아 있다니.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다니.’
루이스가 흘린 피가 아직도 내 손에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루이스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분명 살아 있었다. 내가 회귀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감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 그쳤다. 아무리 오라버니라고 해도 황제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거기다 이미 눈물을 쏟아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내가 여기서 루이스의 얼굴을 만지기라도 하면 정말로 내가 이러는 이유를 해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도 아직 얼떨떨한데 무턱대고 회귀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눈물만큼은 도저히 참아 낼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에 루이스는 혀를 차면서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만 좀 울어라.”
“오라버니를 보니…훌쩍…너무 좋아요……. 훌쩍…….”
“…….”
“크흥-.”
나는 루이스가 준 손수건으로 코를 풀었다. 그래도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여전히 눈물이 나왔다.
보다 못한 루이스가 한마디 했다.
“네 눈물을 모아 놓으면 가뭄 때마다 잔소리하는 것들 입을 막을 수 있겠구나.”
나도 안다. 내가 얼마나 대책 없이 눈물을 쏟고 있는지. 하지만 나는 루이스가 뭐라고 할 때마다 눈물을 그치기는커녕 더 쏟아 냈다.
그야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우는 건데. 루이스가 살아 있다. 그것도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어떻게 그런 말을…제가…흐윽…왜…흑……. 우는지도 모르고…흐으…….”
“그래,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우리 무심한 누이가 나를 이리 생각할 줄이야. 결혼하고 나니 갑자기 철이라도 든 거냐.”
“흐윽…그게 무슨……. 원래…흡…생각 많이 했어요!”
너무 반가워서 투정을 부렸다. 마치 어린 시절에 루이스가 내게 장난을 칠 때마다 억울해서 눈물을 쏟으며 시위했던 것처럼.
루이스도 어린 시절이 떠오른 건지 아니면 그저 내 모습이 웃겼는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결혼한다고 해서 섭섭하기만 했는데. 좋은 점도 있구나.”
“오라버니이이이~~!! 흐어어엉-.”
인제 그만 멈춰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의젓하게 미소를 지으며 루이스를 봐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감정이 쉬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그런 나를 보더니 황당한지 입이 살짝 벌어졌다.
“오라버니이이……. 흐으읍…정말 보고 싶었어요…!"
내가 서럽게 울며 그치지를 않자,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돌출 행동 정도로 여기던 루이스의 얼굴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어느새 헤레이스를 향했다.
“너 무슨 일이 있었구나.”
그의 눈빛이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가 우는 이유를 헤레이스라고 알 리 없었다.
루이스를 본 순간, 내 정신은 5년 전이 아니라 어린 시절로 회귀해 버린 것 같았다. 어릴 때 서러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루이스를 찾아가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울기만 했었다. 철이 들고 나서는 이렇게 남들 앞에서 울어 본 적 없는데.
“에일린.”
“훌쩍…….”
루이스의 목소리에 장난이 묻었다. 그 순간 루이스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이렇게 말하겠지.
“자꾸 못생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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