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1장. 소년을 줍다 (1)
비장한 걸음을 옮겼다.
고풍스러운 문 앞에 멈춰 서자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가 눈인사를 했다. 나를 보는 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또 왔니? 그만큼 내가 여기 스스럼없이 드나든다는 증거다.
“엠브로즈 경이 오셨습니다, 전하.”
그가 깍듯하게 안쪽에 고했다. 간격을 두고 그와 근처에 있는 시종이 번갈아 소식을 알렸다. 집무실 안쪽에서는 반응이 없다. 나는 불안해져서 물었다.
“왜 대답이 없어? 죽은 거 아냐?”
“어디 가서 그런 말씀 하시면 잡혀가십니다.”
기사가 엄격하게 내 말버릇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왕족모욕죄로 잡혀가 봤자 다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여기 국왕이 그 정도 친분은 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냥 들어가시죠, 엠브로즈 경.”
호위 기사는 나를 순순히 보내 주었다. 나도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널따란 방 안쪽에 서류의 산이 보였다. 형식을 갖춘 문서를 10분 이상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나는 나에게는 무서운 풍경이었다.
나는 그 흰색의 바다를 헤치고 첩첩이 쌓여 있는 종이 뒤에서 국왕을 발견했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왕이라는 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알지만, 저 사람도 참…….
짙게 내려온 상대방의 다크서클이 안쓰러웠다. 나는 그녀를 응시하다가 책상 표면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아, 왔나?”
역시 내가 왔다는 소리는 못 들은 모양이다. 어쩐지 대답이 없더니…….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집무 책상에 걸터앉았다. 누가 보면 무엄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의자를 준비해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 휴가 좀 줘.”
다짜고짜 말하자 그녀가 인상을 썼다.
“내가 이 시각까지 일하고 있는 걸 보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네가 일하는 거랑 내가 일하는 게 뭔 상관이야? 내가 귀족이길 해, 지위가 있길 해.”
“다들 그대를 경이라고 부르잖아, 에리얼.”
“필요 없어!”
나는 국왕 앞에서도 짜증을 냈다. 내가 단단히 뿔이 난 것 같은지 왕은 처리하던 서류를 밀어 놓고 안경을 벗었다. 그녀가 느긋하게 물었다.
“지위를 준댔는데 그대가 싫다고 하지 않았나?”
“입에 풀칠할 만큼은 벌고 있으니 괜찮아. 그리고 나라에 돈 없다고 대우가 힘들지도 모른다 했던 건 너였어.”
내가 숫제 이를 갈자 국왕, 레티시아는 킬킬 웃었다. 내가 펄펄 날뛰는 꼴이 재미나는가 보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화를 조절 못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참을성이 아주 많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리얼, 그대가 우리를 위해 애써 준 건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무거운 은혜야. 나도 그대가 얼른 편하게 놀러나 다니면서 지냈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대도 알지만 요즘 다시 저주의 흔적이 강해지기 시작했어. 이걸 방치할 수는 없잖나.”
‘그런데’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만 듣기 좋았다. 내가 허탈한 눈빛을 하자 레티시아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야. 다시 한번 불길한 세력을 몰아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게. 한데 그대 술 마셨나?”
‘술 냄새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레티시아가 나를 의심했다. 어떻게 알았지? 그냥 한 잔만 마셨는데 냄새가 날 정도인가?
나는 레티시아에게까지 내 숨결이 닿지 않도록 잽싸게 물러섰다. 내가 아무리 왕과 격의 없는 사이여도 일하는 곳에 쳐들어가서 술주정 부렸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했다.
대신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억울해서 내가 술을 마시게 된 경위에 대해 서럽게 털어놓았다.
“그놈의 불길한 세력 때문에 며칠 동안 들개처럼 돌아다녔어. 저주받은 뼈다귀, 저주받은 천 조각, 저주받은 보석, 이런 잡동사니들 다 모았다고! 초소에 던져 놓고 오는데 경비대원들은 날 불길한 것처럼 보지. 길가에서 술 파는 아저씨는 밤길에 여자가 무슨 술이냐고 내 인생까지 참견하더라? 완전 배짱 장사야.”
“에리얼 엠브로즈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바깥소식과 단절된 사람인가 보군.”
레티시아가 선술집 주인의 무식함에 혀를 차며 나를 두둔했다. 고맙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식의 공감이 아니다.
내가 이 대륙 아르카디아에 떨어진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때 레티시아는 22살의 연약한 공주님이었는데, 지금은 능구렁이로 자라 버렸다. 5년 별거 아닌 세월 같은데 참 무섭다.
난 그때 집도 절도 없는 허망한 이방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이 고생 중인지 알 수 없었다.
“엉엉, 나 집에 돌아갈래.”
우는 시늉을 하며 레티시아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쁜 여자 같으니. 나에게 돌아갈 집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그녀에게는 통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나는 읽던 책 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남의 몸에서 깨어나 절찬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된 것도 아니고, 어떤 고귀한 존재에게 특수한 사명을 받지도 못했다. 아무 설명도 없이 이 거지 같은 판타지 세계에 버려진 것이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약간 특별해져 있었다. 몸은 맹수처럼 날쌔게 움직였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척척 익혔다. 아, 마법은 못 쓰겠더라. 그건 나도 섭섭하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좀 못살고 가여운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면서 밥값을 했다. 조그만 마을에서 인정받고, 그러다 보니 이웃 영지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거기서 내준 일을 해결하니 다들 좋아하며 나를 추어올렸다.
그렇다. 나는 일명 먼치킨 같은 것이 된 것이다.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그 소식이 왕족에게까지 가 닿았다. 당시 공주였던 레티시아가 소식을 듣고 나를 거둬 주었다.
내가 5년 동안 어떻게 살았더라? 괴수가 출현할 때마다 출동해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기사단 대신 그걸 쓰러뜨렸다. 그뿐만 아니다. 수상한 반역 세력을 잡아 족치고, 신전에서 위험하다고 경고한 흔적을 쫓다가 소환되던 마족도 때려눕혔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덧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구해 낸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보통 영웅으로서의 대우를 해 주는 게 맞지 않을까? 막 소중해서 끼고 다니진 못해도 돈은 많이 줄 줄 알았다.
현실……, 현실은…… 부질없었다. 내 인생의 보잘것없음을 낯선 판타지 세계에서까지 깨닫고 싶지 않았다.
“레티시아. 전하, 들어 봐. 내가 마왕을 토벌한 게 불과 2년 전이야. 걔네 그렇게 빨리 회복 못 하거든? 내가 많이 때려 봐서……, 아니 물리쳐 봐서 아는데, 저주받은 시리즈는 그냥 흑마법사들의 민간신앙 같은 거야. 걔넨 뭐, 저주하면 되게 강해지는 줄 알더라.”
“엠브로즈 경. 경은 아르카디아 대륙의 희망이야.”
내가 이성적으로 설득하려고 해도 레티시아는 영 딴소리를 했다. 나는 떨리는 입꼬리를 당겼다.
“그……, 그렇지.”
“우리 왕국 군대와 귀족들은 그대를 존경한다. 그대 같은 영웅이 되고 싶다는 젊은이들이 셀 수도 없을 정도야.”
그런 인기 필요 없다.
물론 처음에 영웅이라고 환호해 주고 박수쳐 주고 눈물을 글썽거려 줄 때는 나도 인간인지라 좀 헬렐레했었다. 그렇다고 권력의 맛……까지는 내가 권력을 가진 적이 없어 모르겠고, 그래도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왕의 친구 자리도 권력이라면 권력이긴 한데. 그냥 한때 관심을 너무 받아서 미쳤다고 해 두자.
“나의 친우여, 조금만 더 견뎌 주게. 지금은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협력이 필요한 시기야. 다른 대륙과도 교류하며 마법적으로도 무리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이것만 마무리되면…… 국고를 채우는 데도 수월해지겠지. 그러면 그대에게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해 줄 테니.”
청혼이라도 받는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레티시아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었다.
내 인생이 펴지지 못하는 이유는 친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국왕은 지금 블랙 기업의 사장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월급을 제때 못 받은 직원에게 밥을 사 주며 미안함을 때우려고 하는, 그런 파렴치한과 닮아 있다고!
본심은 서류 더미와 함께 책상을 뒤집는 것이었지만, 내가 택한 행동은 아래와 같았다.
쓸쓸하게 집무실에서 나오기.
“잘 안 되셨나 보죠?”
내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우울하게 등장하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가 안쓰러운 것처럼 물었다. 내 표정이 훌륭한 답이 되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마족 자식들. 겨우 평화롭게 만들어 놨는데 왜 또 기어 나오고 그래. 아니다, 이건 그것들을 우상숭배 하는 흑마법사들 탓이다. 이 세계 모든 마법서를 분서갱유처럼 활활 태우고 싶어진다.
* * *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이걸 집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국가에서 대여해 준 내 임시 거처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원룸 크기의 작은 주택인데 겉모습은 귀여웠다. 유감스럽게도 내 땅은 아니다.
“……?”
집에 들어가려는데 문득 짙은 피 냄새가 끼쳐 왔다.
온몸의 솜털이 서면서 본능이 위험 신호를 울려댔다. 이 나라에서 사는 5년 동안 괜히 나한테 화풀이하는 이상한 세력을 종종 봤다. 때로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생명체라면 응당 누군가를 노릴 때 살벌한 기운을 흘리기 마련이다. 그게 없다는 건 나를 노리는 게 아니라는 소리인데…….
주춤거리며 비릿한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나는 원치 않게 흔적 찾기의 고수가 되어 있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쉽게 그것을 발견했다.
제2화. 1장. 소년을 줍다 (2)
“갸아악!”
하지만 내가 고수가 된 것과 담력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피 웅덩이 속에 정체불명의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허억, 허억…….”
아, 내 심장이야. 내 심장……, 제자리에 있나?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이 고였다. 여기 떨어져서 별별 일을 헤쳐 나오긴 했지만, 이래 봬도 나는 공포 영화도 보러 가지 못했다. 가슴이 무척이나 심약한 탓이었다.
참고로 내가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돈 주고 호러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화면을 줄일 수도 없고 음량을 낮출 수도 없는데, 왜 돈을 주고 수명을 줄일까? 지금도 이해는 못 하지만, 장담하건대 나는 취향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저……, 저기요? 저기……, 얘?”
놀람이 조금 가라앉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정도로는 괜찮아졌다. 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지 소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에게서 거칠지만 연약한 숨이 터져 나왔다.
그가 뭔가를 중얼거리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갔다. 피 칠갑을 한 어린애에게 접근하는 건 상당한 담력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긴급한 상황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피 웅덩이를 무시했다.
“살……려, 줘…….”
“으으으.”
나는 그 소리를 알아듣고 앓는 소리를 냈다. 다행히 이 녀석이 괜히 우리 집 앞에서 자살 기도를 한 건 아닌가 보다. 본인이 살려 달라고 했으니, 정말 살렸다가 왜 살렸냐고 멱살 잡힐 일도 없을 것 같고…….
한시가 급했다. 위험한 상태일 수도 있으니 치료를 하려면 빨리 하는 게 낫다.
머릿속 한편에서는 의심이 몰아쳤다. 이 수상한 소년이 나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하려는 스파이는 아닌지, 아니면 나에게 앙심을 품은 무리가 엿 먹으라고 던져 놓은 건지.
“조금만 참아.”
한 손으로는 소년의 등을 받치고, 남은 손으로는 오금으로 팔을 집어넣어서 번쩍 들어 올렸다. 꽤 묵직했다. 그래도 내가 사흘 동안 찾아 모았던 저주받은 잡동사니 자루보다는 가벼웠다.
그새 완전히 의식을 잃었는지 소년의 눈꺼풀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이만큼 쏟아 낸 피가 이 소년의 것이라면 지금 차라리 기절해 있는 게 나을 것이다. 어휴, 나도 이렇게 다쳐 본 적 없는데. 끔찍해라.
집에 들어가자마자 비교적 깨끗한 바닥에 그를 눕혔다. 피가 집 안 곳곳에 묻고 있었지만, 사람 목숨이 달렸는데 그걸 언짢아하고 있을 순 없었다.
어딜 다쳤는지 알기 위해 일단 부상자의 옷부터 벗겼다. 워낙 피에 젖어 있어 가위로 자르고 손으로 찢어 내야 했다. 깨끗한 물수건으로 피를 훔친 뒤, 아직도 피가 흐르는 부위에 포션을 부었다.
영웅들의 필수품, 포션. 집은 없어도 회복 포션은 산더미만큼 쟁여 놨다. 크게 다칠 일이 없어 정작 내가 쓴 적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효과가 좋았다.
흑마법사 놈들, 좋은 물건을 갖고 있었군…….
“어디서 이렇게 다쳤담.”
닦아 놓고 보니 소년은 이제 1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얼굴이 곱상해서 성별을 착각한 건 아닐까 고민했는데, 납작하기 그지없는 가슴을 보면 그것도 아니다.
아무리 봐도 칼에 베인 상처였다. 게다가 뭔가 마법적인 흔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꺼림칙한 기운이 세상에 두 개 있지는 않을 테고.
지혈을 마치고 상처 부위를 붕대로 감아 가볍게 압박했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내 침대에 눕혔다. 환자를 바닥에 재우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였다.
일단 응급처치로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 이미 밤이 늦었으니 의사는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치료하면서 물수건으로나마 닦아 주었지만, 소년은 깨끗한 상태는 아니었다. 의식을 차리고 나면 내 침대 시트 및 이불을 대대적으로 빨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벌써 힘이 빠진다.
“바닥이…… 차갑네.”
여분의 이불을 깔고 바닥에 누웠다. 여름인데도 싸늘한 기운이 등에 맴돌았다. 내 처우에 대한 협상을 실패하고 집에 돌아와 정체불명의 부상자를 구한 뒤 바닥에서 잠들려니 뼛골까지 추웠다.
그뿐만 아니다. 침대에서 자는 버릇을 들였더니 맨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게 몹시 어려웠다. 이리저리 자세를 잡아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을 설치게 되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래도 내일은 일을 안 해도 될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레티시아도 내가 토라진 줄 알 테니, 그 핑계로 며칠 태업해야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절한 김에 잠이 들었는지 소년의 숨소리는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이 나쁘지 않았다.
뭐 하는 녀석이기에 습격당한 채 우리 집까지 왔을까? 위치 선정이 지나치게 공교로운데…….
진짜 누가 나 살인 혐의 씌우려고 수 쓴 거 아냐? 등골이 다시 오싹해졌다. 영웅 노릇 몇 년 만에 무고한 소년을 죽였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어느 멍청이가 그걸 믿겠냐만…….
나는 끝없는 의심에 자아를 맡겼다가 포기했다. 세상에는 사람을 이유 없이 증오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건 유명할수록 더 심했다. 지금은 원치 않아도 나는 꽤 유명한 편이고.
이상하다, 이상해. 비 오는 날 사람 줍는 이야기는 들어 봤는데, 오늘은 그냥 후텁지근한 여름밤이다. 우연적인 낭만을 느껴 보기에는 소년의 상처가 심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자자.”
스스로를 다독였다. 무념무상. 무념무상이다. 세뇌하듯 중얼거려도 기분이 개운해지지는 않았다.
아르카디아가 한없이 평화로워서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다. 국고가 빨리 불어나서 잘 먹고 잘살고 싶다.
기약 없는 희망을 품은 채 억지로 눈을 붙였다.
* * *
“이봐…….”
환청을 들었다.
나쁜 꿈을 꾸는 건 흔한 일이다. 여기 와서 편안하게 자 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방문하는 게 불면증이라, 나는 어떤 개꿈을 꿔도 그리 당황하지 않는다.
애초에 현실이 꿈보다 더 답이 없어서 그런가?
그래서 나는 어떤 개꿈이 펼쳐질지 관망했다. 차라리 행복한 꿈만 아니면 좋겠다. 나에게 떨어질 리 없는 그런 환상 같은 꿈을 꾸면 하루를 울적하게 시작할지도 모른다.
“이봐!”
아니면 가위에 눌린 걸까? 고등학생 시절, 귓가에서 누가 계속 말을 거는 가위에 눌린 일화를 들은 적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름 정도 잠자리에 들면서 불안해했다.
이럴 때 대처법은 뭐지? 반야심경 읊기? 사도신경 외우기? 사실 여기서 생활하면서 신이 날 버렸다고 오래전에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와 신에게 매달리는 게 현명한 일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말 좀…….”
어쩌면 환청 따위는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허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은은한 통증에 끙끙대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딱딱한 바닥에 이불 한 장 깔고 누웠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같이 번뜩였다.
“헉.”
파란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터키석이 생각나는 쨍한 하늘색 눈이었다.
눈 뜬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야 내가 본 어제의 부상자는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고, 곧 기절했으니 당연했다.
“나를, 치료한 게 당신인가?”
내 침대에 앉은 채 소년이 물었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데도 몹시 예쁜 얼굴이었다. 부상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니 병색이 완연한데도 미모부터 보이다니, 보통이 아닌 녀석이다.
그래서 나는 버르장머리 없이 나에게 반말을 하는 태도를 눈감아 주기로 했다. 일단 예쁘니까 용서해 준다.
“언제 정신 차렸어?”
나는 불쑥 물었다. 소년은 내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자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하긴 했다.
“아마…… 해가 뜰 때쯤.”
가늘게 뜬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벽시계의 시간도 확인했다. 낮이다. 상심이 너무 커서 푸지게 잔 것 같았다. 어쩐지 허리가 사라진 것 같더라니 이유가 있었다.
“깨우지 그랬어?”
“깨웠어, 계속……. 안 일어난 건 그쪽이다.”
좀 머쓱해졌다. 새 나라의 어린이, 까지는 아니어도 어쨌거나 앳된 얼굴에 나이도 어려 보이는 애가 나보다 부지런하게 일어났는데 나는 꿈나라에 가 있었다니.
비척비척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소년은 내가 다짜고짜 옆에 붙어 앉자 당황한 눈치였다. 뭐, 이건 내 침대라고. 불만이냐? 이런 눈빛으로 한번 쳐다본 뒤 그의 행색을 다시 살폈다.
안색이 좋진 않지만 확실히 밤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몸을 일으켜서 나에게 말을 걸 정도로는 회복된 것 같으니까…….
“좀 어때?”
“나를 치료한 게 당신이냐니까?”
이번에는 그가 질문으로 대꾸했다. 조금 전에 의도치 않게 씹은 죄가 있어 나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설마 치료했다고 나를 공격하지는 않겠지? 보따리 내놓으라고도 안 하겠지? 살다 온 세상이 워낙 험해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귀가했는데 네가 내 집 앞에 쓰러져 있었어. 응급처치는 해 놨다만…….”
“고……맙다.”
소년은 뻣뻣하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했다. 왜 살렸냐고 내 멱살을 잡지 않아서 다행이다. 화를 낸다면 한 대 때리고 내쫓으려고 했다.
그가 붕대에 감긴 제 몸을 더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피가 너무 흘러서……. 아무리 나라도 위험하다고……. 그놈들이 내가 멀쩡히 살아날 수 있는 곳에 던져두지 않았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군.”
“어디 귀한 집 자식이니?”
미심쩍게 물었다. 소년이 흠칫해서 나를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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